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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방문기 모음/기림 문화에 관한 생각

왜 독일에 '평화의 소녀상'이 서야 하는 거니?


그가 물었다. 왜 독일에 '평화의 소녀상'이 서야 하는 거냐고. 


물론 우리들이 그 전까지 함께한 역사를 생각하자면, 설 필요가 없다는 반어적인 질문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이미 닥치고 있는, 혹은 앞으로 닥칠 당위성 논란에 대한 사전 방어 예식이기도 했다. 


물론 우리들이 이런 이야기를 처음으로 주고 받은 것은 아니었다. 매번 우리는 다른 이유를 대었고, 매번 우리들의 상황에 따라 다른 측면을 부각했다. '평화의 소녀상'을 있게 한 바로 그러한 역사적 사실이 지니는 복합성 때문이기도 했다. 


세계에서 유래가 없었던, 국가가 주도한, 여성에 대한 조직적인 최대 범죄인 일본군 성노예 체제는 들여다보면 들여다볼 수록 인간이 어디까지 야만스러울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 그 사건에 대한 기림 조형물이 설 때면 어김없이 비집고 들어서는 21세기 일본 정부의 논리, 그것인 자발적인 것이었으며, 한국인들이 일본인을 나쁜 사람 만들기 위해 퍼뜨리는 것이라는 거짓 주장... 


그에게 오늘은 다르게 대답했다. Warum nicht? 안 될 게 뭐가 있니? 왜 그런 질문이 존재해야 하니? 요즘 소비재가 넘나드는 국경이 뭐 따로 있니? 아시아에서도 이탤리 스파게티를 먹고 유럽에서도 아시아의 라면을 먹지 않니? 오늘날처럼 국경이 허물어진 시대에 왜 아시아의 이야기가 유럽에 전달되면 안 되는 거니? 그건 아시아에서 일어났지만 세계 2차대전 중에 일어난 인류 최대의 여성 학대 범죄였어. 하루에 수십 명 남자가 달려드는 데 그것에다가 어찌 매춘이라느니 자발적인 것이라는 말을 덧붙일 수 있겠니? 강간이란 말, 성적 폭력이란 말도 모두 너무 점잖은 말이야. 그건 고문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난 5월 초 쾰른에서 만난 연방 정치교육국의 어떤 여성의 표현을 인용했다. 그건 고문이야. 그녀가 김학순 할머니 얘기를 들었을 때 그렇게 말했다. 역시 여자는 그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안다 싶었다. 


그는 내 대답이 성의없게 들리는 듯했다. "어째, 소녀상을 소비재와 비교하니?" 


잠시 움칠했지만, 다시 생각하니 내가 그리 잘못 말한 것 같지는 않았다. 소비재도 맘대로 넘나다니는 국경, 예술은 왜 넘나다니지 못하는가? 그것이 더군다가 인류사에 대한 교육자료로서 좋은 역할을 한다면야...

왜 독일에 '평화의 소녀상'이 서야 하는 거니? 


인간의 의식이 생성하는 질문은 정당하다. 그러나 '평화의 소녀상' 건립 프로젝트를 방해하는 세력이 없다는 이러한 문제가 이렇게 자주 대두될까? 


이 질문 앞에서 대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는 순간, 어쩌면 프레임에 말려드는 것 아닌가 싶다. 프레임에 말려 들지 않기 위해서는 더 크게 더 넓게 보아야 한다. 


독일 본에 있는 여성박물관에 '평화의 소녀상'이 서기로 했다. 


5월 5일, 뒤셀도르프에 있는 일본 공관원들이 찾아와서 계획을 중단해 달라고 종용했다 한다. 또 여러 차례 이메일이 박물관 관장 피첸 여사에게 날아오면서 프로젝트 중단을 요청한다. 관장은 이리 진행된 역사의 시계는 되돌릴 수 없다고 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앞으로 이 시간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수원에 사시던 안점순 할머니가 평화의 소녀상 옆자리에 앉은 또 하나의 소녀상을 어루만지고 있다. 이 소녀상은 2017년 8월 14일 일본군성노예피해자기림일을 맞아 서울의 버스회사에서 착안하여 김서경 김운성 작가가 제작한 버스 탄 소녀상이다. 버스 탄 소녀상은 서울에서 버스 타고 다니기 퍼포먼스를 한 뒤 경기도 성남과 수원에서도 같은 퍼포먼스를 하였다. (사진제공: 수원 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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